Saturday, May 30, 2009


먼저 익숙하기도 하고 매력적인기도 하면서 달갑지 않은 막연한 오한 증상이 그 전조로서 다가온다. 그 다음 감상적인 느낌이 가시적 세상을 뒤덮고, 이 느낌을 통하여 그것의 색채와 윤곽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짙어지고 선명해진다. . . 리처드 휴즈의 "자메이카의 광풍 A High Wind in Jamaica" 은 - 환각과 열병적인 상태가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 어린 시절 병들었을 때의 육체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실로 이 책은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한 (또는 그랬기를 바라는)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을 생각나게 함과 동시에 우리 어른들이 많은 공을 들여 구축해놓은 도덕관념 체계를 교묘한 이지를 발휘하여 분해한다.

이 책은 서인도 제도의 폐허가 된 가옥들, 노예 숙소, “지진, 화재, 비, 그리고 더 지독한 초목”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균등하게 된 (폐허가 된) 대저택을 배경으로 시작하면서, 도금 시계와 도살된 닭의 피가 묻은 깃털들 가운데 하인들에 의하여 아사餓死를 당하게 되는 연로한 두 파커 자매의 끔찍한 ‘카메오 출연’을 잠깐 다룬다.

정경은 소름끼치고 몽환적이지만 소설의 언어는 섬세하고 적확하다 - 話者에게는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머리 씀이 있다. 독자는 어조와 내용 사이의 부조화를 바로 인식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마음이 교란된다. 그러나 이것은 휴즈가 말하고자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중추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자메이카의 광풍”은 표면적으로는 해적들에게 잡힌 영국 어린이 다섯 명에 관한 모험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쾌활한 놀이에 잠복해 있는 것은 살인, 이유 없는 폭력, 고딕 풍의 성적 표출, 변덕스런 배반 등이며, 케이트 그린웨이의 그림보다는 “국외자”였던 예술가 헨리 다저의 그림이 더 생각나는 이야기다.

독자가 바스쏜튼 가족을 처음 만나는 곳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메이카다. 손튼 씨는 “모종의 일”에 관계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의 할일이 있으며, 이 일이란 대부분 그 섬의 운 나쁜 토착 동물들이 처해지게 되는 연속적인 잔인함과 관련이 있다.

이 “영국 어린이들의 낙원”에서 장남인 존은 반 야생적 애완 고양이 태비의 미각적 즐거움과 오락을 위하여 쥐를 잡는데, 이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독사들과의 사투를 즐긴다. 세 딸 가운데 맏이인 에밀리의 아주 독특한 경험과 자의식이 이 소설의 중심에 있으며, 이 아이는 “집 도마뱀들을 잡되, 도마뱀들이 겁을 먹을 때 스스로 꼬리를 끊지 않도록 하며 잡는 일을 아주 재미있어 한다. 이 아이의 방에는 도마뱀들과 여러 애완동물들로 가득하며, 살아 있는 것들도 있지만 보나마나 죽어 있을 것 같은 것들도 있다.”

쏜튼 가의 아이들의 영역은 야생으로 돌아간 아이들이라고 할 만치 부모들의 영역과 동떨어져 있으며 다르다. 쏜튼 부부는 자식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또는 그들이 내면으로 실연하는 뜨겁고 고조된 흥분의 드라마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종류의 생활은 매우 평화스러웠으며 존과 같이 신경이 과민한 아이들에게는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경과민과는 거리가 먼 에밀리 같은 아이에게는 정말이지 어떤 자극과 흥분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몽매에서 깨어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 생활은 너무 단조롭다.”

태풍으로 - 이것보다는 천둥과 번개가 치는 와중에 살쾡이들에게 쫓겨 집으로 들어왔다가 결국 살아남지 못하는 태비의 사건이 아이들의 주의를 독차지한다 - 집의 지붕이 날아가고 나서야 쏜튼 부부는 섬 생활이 확실히 아이들에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식들을 영국에 보내기 위하여 크로린다라는 배에 태운다.

소설이 이 시점에 이를 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휴즈에 의하여 조건 반응에 처해지게 된다. 즉, 어떤 동물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최악의 사태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보호적인 반사 운동조차도 클로린다의 선원들이 애완 원숭이의 암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려고 하는 소름끼치는 장면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해주지 못한다.

뒤따르는 혼란 상황의 와중에 배는 해적들에게 점령당하고 모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일 이후 서커스 사자와 호랑이를 싸움 붙이려는 폭동적인 시도에 해적들이 흥겹게 몰두하는 동안 벌어지는 잔인함에도 마음을 무장시키주지 못한다.

소설 전편에 걸쳐 자연과 인간의 본성은 모두 악하고 위협적이다. 동물의 肉感은 - 에밀리가 수영을 할 때 "수백 마리의 새끼 물고기들이 에밀리의 몸 구석구석을 탐색적인 입질로, 즉 일종의 가벼운 키스 행위로 간지럼 태우고 있었다" - "혐오스럽다." 지는 태양은 - "야릇하게 무언가 위협적인 듯 현저하게 커다랗고 붉어" - 약탈적이고 변태적인 듯하다.

아이들 자신들은 본질적으로 "악마적인 이스트"가 번식하는 살아 있는 페트리 접시들이며, 우리는 실수를 잘하는 해적들을 처음에는 좋아하는데, 이것은 비열한 장면들에 의하여 삭감된다. 술에 취한 존슨 선장이 에밀리에 대하여 보이는 음산한 관심의 표현은 에밀리로 하여금 자기 방어로 그의 손가락을 깨물게 하며 또 선장은 나중에는 자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들여다보면서, 에밀리가 아직 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어린 로라의 위로 향하고 가리지 않은 엉덩이에 그의 손톱을 가볍게 튀긴다.

휴즈는 세상과 그 세상 거주자들에 대한 깜짝 놀랄 불편한 진리를 깊이 논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가 “자메이카의 狂風”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수행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아이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에 - 워즈워드적인 순진함밖에 모르는 아이들에 대한 관념에 - 사악이라는 관점을 부가한다. 그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도 더 자연에 가깝다고, 섹스에 대한 아이들의 관점이 - 신비스럽고, 매혹적이고, 불가해하고, 불쾌하고, 불가사의한 관계의 원인,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의 원인이 되는 - 섹스의 진짜 모습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클로린다 호를 포획하는 데 일조한 야하고 "재잘대는" 드래그 퀸들의 직접적인 실제, 또는 애완용 악어와 함께 자게 되는 에밀리, 또는 해적들이 쿠바에 들를 때 뚱뚱하고 수염이 난 늙은 여자가 어린 에드워드를 잡고 숨이 막힐 정도로 퍼붓는 키스 등에 비해, 서로 동의하는 어른들의 정욕은 예의를 갖춘 인습이다. ("에드워드는 보아 구렁이에게 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불길한 여자는 마치 진짜 보아 구렁이인 것처럼 에드워드를 노려보아 꼼짝 못하게 했다. 에드워드는 무기력하게, 그리고 자의식을 느끼며 그녀의 팔에 안겨 낙담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에밀리와 선장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중에 해적들이 아이들을 내어놓은 증기선의 - 아이들은 이 배로 영국에 가게 된다 - 매혹적인 선객 루이사 도슨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혼동과 매혹, 공포와 위로는, 키스하는 새끼 물고기들과의 조우가 그랬던 것처럼, 매력과 반감이 교차하는 다형적인 영역에 속한다. 선장은 어린 사내아이가 할 법한 일종의 성적인 낙서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한번은 그가 에밀리가 침상 옆 벽에 연필로 그려놓은 그림에 덧그림을 그린다:

존슨은 두 가지 그림밖에 그릴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배, 그리고 여자의 나체... 그는 펜들을 들었다. 그리고 이내 에밀리가 그린 서툴고 불확실한 선들 틈으로 둥그스름한 허벅지, 둥그스름한 배, 높이 부푼 가슴 등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모두 다소 루벤스적인 작풍이었다.

어른이 어린 소녀의 낙서를 개작하는 장면은 육감에 대한 어린아이의 왜곡된 시각을 상기시키는 당혹스럽고 감각적인 예각을 내포한다. 여기에 기묘한 순진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른의 성적인 관심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건전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면 어른의 도덕심은 결코 더 성숙하다거나 혹은 더 발달되었다고 볼 수 없으리라. 거짓말하지 않고 유독한 비밀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특히 그렇다. ("어른들은 상당한 불안감을 가지고 속임의 인생을 살며 이것은 대개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경우는 다르다. 어린이는 가장 소름끼치는 비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감출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 비밀을 탐지당할 위험이 없다.")

어떤 연령이든 사람들은 누구든 다 거의 정신병적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련의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속옷을 언급한다거나 어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옳지 않지만, 기도를 할 때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다거나, 중죄를 심의하는 법정에서 판사가 배심원을 오도하는 것은 용납되는 것이다 (또는 특기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다지 기억을 지니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부모들과의 이별에 신속하게 적응하고, 그들 가운데 있었던 죽음의 충격으로부터 놀랄 만큼 쉽고 융통성 있게 회복한다.

책이 끝나갈 때쯤, 아이들의 시련에 대하여 어른들이 그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어른들 자신들은 진리에 거의 혹은 전혀 관심하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아이들의 의식과 뒤섞이거나 그것을 대체해버린다.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재판을 주재하는 법률가들을 만나게 될 때 이 정의와 고고한 문명의 대리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해적들에게 법복과 가발을 씌워놓은 것과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휴즈가 교묘하게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는 정반대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에 관심을 갖는 쪽은 소설가이며, 소설가들의 일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행했는지 말하는 것이다. 법률가들은 추정되는 상황 하에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여주는 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으며 또 그러리라는 기대를 받지 않는다."

간혹 이 소설에 비교되지만 이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의 대왕"과는 달리 리처드 휴즈의 소설은 어떤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교훈, 통념적인 지혜나 불쾌한 진실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를 물리친다. 사실 이 책처럼 조금이라도 위안이나 위로 부스러기를 던져 주기를, 그리고 또 정직이나 선행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인물을 단 한 사람이라도 제시하기를 그렇게 유쾌하게 거부하는 소설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

결국 이 총명하고 비범한 소설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래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그만큼 그 반대여서 우리는 정신적인 혼란에 빠진다 - 사물의 본모습과 사물이 어떠해야 하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 효과는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우며, 몽환적이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실재 그대로이기도 하다. 역사가 순진과 악함을 논하는 말 자체를 영원히 바꾸어버린 사건들을 준비하고 있던 1929년에 출판된 "자메이카의 광풍"은 위험과 피, 즉 (말하자면 풍문에) 미래의 위험과 피의 경고의 냄새를 맡은 선견지명이 있는 예술 작품의 하나이다.

- Francine Prose
Trans. 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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