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31, 2009
“아무리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교수는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라르슈(L'Arche) 설립자 장 바니에는 왜 장애인들을 섬기기로 결정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어떤 이유로 그리했습니까?”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다면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고 이전에 일어난 가장 정직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20년 전에 매킨토시 클래식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컴퓨터를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일을 해왔지만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역할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기계의 속성으로 인하여 피할 수 없는 허위의식에 구축되는 세계가 바로 가상공간인 까닭에 회의적이다. 필요한 정보를 전에 없이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에 어떠한 긍정적 기여를 하는지 별로 발견하지 못한다.
新보수주의, 新자유주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에 저항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으며, 정보공유의 마당으로서의 역할을 마땅히 수행해내고 있고 이 분야에 많은 잠세력이 있지만, 인성 고양이라는 측면에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상정하는 내용의 질과 이에 대한 반응 방식에 진정성이 있다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싶다. 그리고 진정성이 있기만 하다면 극히 드물지만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