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 2009




현대인은 항상 분주하다. 무엇을 하든 항상 시간이 모자라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거센 흐름에서 구출될 수 있을까? 신앙의 눈으로 보는 시간은 어떨까? 인류 역사상 ‘여가’ 시간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많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반면 그렇게도 ‘시간’이 없던 적도 없었다. 시간은 돈이요 귀한 것이 되었다. 세상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듯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짧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 좋은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놓칠까봐 허둥지둥한다.

고속열차, 팩스, 이메일, 인터넷, 비디오를 통한 시공時空 정복은 현대판 유토피아인 듯하다. 모든 것이 상승(!)하는 듯하며 사람들은 이 상승하는 모든 것에 뒤지지 않으려 한다. 한 곳에 있으면서 도처에 편재하기 원한다. 초월자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강박관념이다.

우리 인간의 수명과 세상에 보이는 가능성 사이의 간격은 우리를 부추겨 ‘시간과 경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을 잃는다. 남보다 더 분주해야만 이 짧은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바쁘다는 것은 성공의 원천이자 표상이 되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자부심의 현대적 가면이다.

우리는 갈수록 빠르게 이동한다. 빠르게 이동하는 여행을 통해 체험을 수집한다. 사회학자들은 ‘체험의 사회’라고도 부른다. 갈수록 더 많은 ‘연줄contact’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다. 패스트푸드는 분주한 삶의 상징이 되었다. 고속 질주하는 현대인들은 맥도널드가 먹여 살린다. 가련한 현대인.

현대인은 많은 체험을 하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기회만 되면 무엇이든 다 보고 듣고 슬라이드나 비디오에 담아 간직하지만 그것을 깊이 이해하거나 기억하거나 소화흡수하지 않는다. 연락할 데는 많지만 깊은 사귐은 없다. 누구를 만나든 이제 그만 ‘가봐야 돼’기 때문에, 항상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도는 것을 수치스럽게까지 여긴다. 햄버거로 점심을 때워도 차분히 앉아서 먹지를 못한다. 아무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무언가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이 드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인은 시간이 없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늘 애를 쓰기 때문이다. 한정된 ‘인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움켜쥐지만 그것을 왈칵 낚아채다가 결국은 질식을 시키고 만다.

고속 질주의 삶이 짧은 인생을 늘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자기 밥그릇을 찾아 먹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무언가 기회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함으로써,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된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두루 여행하지만 그것은 사실 여행이 아니다. 항상 빨리 스쳐 지나갈 정도의 시간밖에 없는 까닭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더 빨리 이동함으로써 시간을 따라잡으려 하며, 그럴수록 더 얻는 것은 없다. 어디에 있든 이동중일뿐, 머무름은 없다. 아무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갈수록 더 서두르며 사는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피상적인 삶을 살게 되며, 결국은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놓친다. 그런 사람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있는 것은 가능성일 뿐 실체적인 것은 별로 없다.

시계는 현대인의 삶에서 핵심적인 기계이며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인도의 어떤 현자가 어떤 서양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시계가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 기계 장치가 가리키는 시간은 우리의 삶을 다스린다.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삶의 질과 관계가 있지만 시계의 계량된 시간은 단순히 삶의 양일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가장 집중해서, 또는 가장 치열하게 경험하고자 할 때는 시계를 치워버리거나 최소한 시계를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시계에 의해 계량되는 시간의 독재를 타도할 때 비로소 사는 것 다운 삶이 된다.

탐욕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억제된 공포 탓일지 모른다. ‘죽음은 끝’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체험하며 살고자 하는 조급함으로 나타난다. 개인이 자신을 전체의 일개 구성원으로 인식하던 전통적인 사회에서 유리된 현대의 개별화된 개인의식은 자기밖에 모른다. 이런 까닭에 모든 것을 자기와 관련시켜 생각하며, 전체의 존속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게 그만이다는 생각을 한다. 개인의식보다도 전체에 대한 소속감이 강했던 옛날로 회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한시적이고 한정적인 삶을 영원한 절대자의 삶 앞에 내려놓고 그에게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영원한 삶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많다. 지금 이 시간 어느 한 곳에 꾸물거리며 오래 머물기도 하고, 깊은 인생 체험에 자신을 내맡기기도 한다. 현재 이 순간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살 때 우리는 영원을 체험한다. 사는 것같이 사는 한 순간의 집중된 삶이, 많은 것을 섭렵하며 서둘러 지나쳐가는 인생보다 더 좋지 않을까?

매순간을 최대한 집중해서 영원히 계속되는 순간처럼 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감각기관은 전과 달리 또렷해진다. 같은 색깔을 보아도 같은 소리를 들어도 같은 맛을 보아도 전과 같지 않다. 영원을 향한 희망은 우리가 놓고 싶지 않은 이생의 시간을 남기고 갈 수 있도록 죽음 너머에 있는 광활한 지평을 열어 보인다. 희망, 믿음의 눈으로 보는 시간은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 Jürgen Moltmann
Trans. 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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